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중 공방전 (문단 편집) === 탕거 전투 === >태조(조조)는 산관(散關)을 지나 한중으로 들어가면서 또 다시 먼저 장합을 보내 보졸 5천을 이끌고 선두에서 길을 뚫도록 했다. 양평(陽平)에 도착했는데 장로가 항복하자 태조는 돌아왔고, 장합과 하후연을 남겨 한중을 수비하며 유비에 맞서도록 했다. 장합은 따로 여러군대를 이끌고 파동(巴東), 파서(巴西)의 2군을 항복시키고, 그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겼다. 탕거(宕渠 - 익주 파군 탕거현)로 진군하여 유비의 장수인 장비(張飛)와 겨루었고, 군을 물려 남정(南鄭 - 익주 한중군 남정현)으로 돌아왔다. 탕구장군(盪寇將軍)에 임명되었다. >---- >《정사 삼국지》 장합전 ---- >11월, 장로(張魯)가 파중(巴中)으로부터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와서 항복했다. 장로와 그 다섯 아들을 모두 열후에 봉했다. 유비가 유장(劉璋)을 습격해 익주(益州)를 차지하고 마침내 파중을 점거했다. 장합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다. > >12월, 공이 남정(南鄭)으로부터 돌아오며, 하후연을 남겨 한중에 주둔하게 했다. >---- >《정사 삼국지》 무제기 ---- >장비는 정졸(精卒 - 정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장합군을 요격하여 교전했는데 (장합군은) 산길이 좁아 앞뒤가 서로 구원할 수 없었고 장비가 마침내 장합을 격파했다. 장합은 말을 버린 채 산을 타며 단지 휘하 10여 명과 함께 샛길을 따라 퇴각했고, (장합이) 군을 이끌고 남정(南鄭 - 한중군 남정현)으로 돌아가니 파(巴) 땅은 안정을 찾았다. >---- >《정사 삼국지》 장비전 한중전투 중 일종의 간보기 같은 전투. 장비의 군은 1만이라고 명시되어 있으나 장합의 병력이 어느 정도 되었을지는 알 수가 없다.(연의에선 3만) 5천여에서 수만여 내외가 아닐까 추측되는데, 요격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 별동대 작전으로 앞뒤가 분산되어 연계가 전혀 안 되는 채로 대파한 것으로 보인다. 215년 9월 파군의 7성(七姓)의 이민족왕 [[박호]], 종읍후(賨邑侯) [[두호]]가 파군의 이(夷)족, 이민족들을 들어 항복해왔고 이를 [[황권]]이 격파했으며 11월 [[장로(삼국지)|장로]]가 항복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이때 유비가 유장을 습격해 익주를 차지하고 마침내 파중을 점거했는데 장합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다고 한다. 조조가 대군을 들어 한중을 점령하고 남정에 있을 당시에 장합을 시켜서 보낸 것으므로 그 병력이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12월 조조가 돌아가며 [[하후연]]과 [[장합]]을 남겨 한천을 수비하도록 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장로가 파중으로 달아나 항복했을 때 [[황권]]이 [[두호]]와 [[박호]]를 격파하였고 이때 위공 조조가 장합에게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하고 3파 지역을 순행하며 그곳의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여 군대를 탕거로 진군시켰다. 유비는 파서태수 장비를 시켜 장합과 서로 대치하게 하였고 50여 일이 지나자 장비가 장합을 습격하여 크게 대파하였으며 장합은 남정으로 달아났고 유비도 성도로 돌아갔다. 장비전에 따르면 장합은 별도로 제군(諸軍)을 지휘해 파서와 파동으로 내려가 항복을 받고 그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니, 탕거, 몽두, 탕석으로 진군해 장비와 50여 일간 서로 겨루었다. 장비는 정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장합군을 요격하여 교전했는데 장합군은 산길이 좁아 앞뒤가 서로 구원할 수 없었고 장비가 마침내 장합을 격파했다. 장합은 말을 버린 채 산을 타며 단지 휘하 10여 명과 함께 샛길을 따라 퇴각했고, 장합이 군을 이끌고 남정으로 돌아가니 파(巴) 땅은 안정을 찾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